BOOK

관악의 어제와 오늘 

발행일자: 1991년 12월 20일
발행기관: 서울시 관악구

서울올림픽대회 준비사업사진첩

서울올림픽 대회 준비사업 사진첩에 실린 봉천동 모습. 촬영시기가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1988년 올림픽 준비 사진첩 이라는 명칭을 봐서는 1988년 이전으로 추정. 현재 서울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전시제목: 뮈에인 내 마음속의 오목렌즈
전시일자: 2023년 1월 13일 - 3월 5일
장소: 서울대학교미술관
참여작가: 김정일, 임정의, 최봉림, 김재경 
첨부파일: 전시도록 & 인쇄물
사진촬영장소: 재개발 구역으로 금호동, 봉천동, 옥수동의 풍경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책 <봉천동 사람들>

2020년 어르신에 대한 지역사회 인식 개선 및 공감사업 '그림책으로 이웃이 되다'
온라인전시: https://url.kr/g7uj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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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여덟에 서울로 와서 봉천동 산 101번지에 살기 시작한 건 20년전쯤, 아들 둘 낳아 키웠다. 일두빌라에 오래 살았고, 재개발되면서 국회단지쪽으로 이사했다. "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대방동 신혼집이 철거되면서 '우리끼리 지은 집'에서 시작해 봉천동에서 41년을 살았다."

" 그때는 봉천동이 시골만도 못했지. 여섯살 먹은 막내가 저녁녘에 마당에 누워서 물어. 엄마, 서울 간다믄서 왜 안가? 여가 서울이지 그랬더니. 여가 뭔 서울이여?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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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그림책 <봉천동 사람들>
그림책 제공: 봉천동 나눔의 집 

관악의 역사를 찾아서, 김영헌

"봉천동에는 옛날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지명과 자연부락이 남아 있는데 현재 봉천동이 12개의 행정동으로 구상되어 있듯이 옛날에도 12개의 봉천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다. 12개의 봉천은 당골(봉천1동), 다골(봉천 1동 일부), 화다리(봉천본동), 호리목(봉천 5동과 봉천 9동 일부), 박재궁(봉천10동과 3동 일부), 독적골(봉천 3동과 6동 일부), 원당(봉천 6동), 탑골(봉천11동), 삼막골(봉천11동일부), 새실(봉천 7동), 안골(봉천7동), 청능말(봉천 4동과 8동 일부) 등으로 지금의 행정 12개동과 일치한다."
p287

"이외에도 자라산이 지금의 봉천본동(은천동)과 봉천 4동(청룡동)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약 5천여 평 정도의 크기에 자라같이 생긴 산으로, 왜정 말기에는 산 정상을 깎아 운동장으로 만들어 일본군의 훈련장으로 사용했으며, 지금의 장군봉을 화경터라 불렀던 왜정말기에는 일본군이 산봉우리를 깎아 고사포 진지를 만들어 대동아전쟁을 대비하기도 했다." p287

"봉신동은 1963년 1월 1일로 시흥군 동면의 봉천리, 신림리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봉천동과 신림동 지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 되었던 행정동명으로, 2개동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3년만인 1966년 5월 1일 봉천동과 신림동이 나눠지면서 없어졌다. '봉신'이라는 이름은 1981년 지금의 신대방길에 붙여저 봉신로로 불리어지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1984년 개칭되었고, 신림로가 봉천천을 횡단하는 곳인 신림동 1428-1번지의 다리 이름에도 봉신교라 이름했지만, 이 다리마저 봉천천이 복개되면서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p287

노인 자서전 모음집, 이만하면 잘 살았지 

2016(제3회) 경기평택 안중도서관 어르신 프로그램, 노인자서전쓰기 강좌
를 기반으로 발간된, 노인 자서전 모음집에서 발췌한 "봉천동"에 관련된 내용.

발행일: 2016년 8월 9일
발행처: 평택시립안중도서관
출처: 경기도 메모리
https://url.kr/pzoW4M 
키워드 : '영등포구' 봉천동 산 81번지, 산101번지, 봉천고개, 봉천극장

"그 무렵 시누이가 봉천동 산 81번지에 가게 하나가 비어 있다하여"

"하루종일 큰딸을 등에 업고 뉘와 돌을 손으로 고르며 애를 업은 채로 쌀을 머리에 이고 고개, 고개 배달해 주던 봉천동 산 81번지! 어찌나 그렇게도 미끄럽던지 그래도 나는 신나고 너무 좋았다."

"그 당시 봉천동에는 아침 저녁끼니를 국수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됫박 쌀도 외상이 많아 장사가 너무 안되어 다음 해 용두동으로 28만원 전세로 가게를 옮겼다." p19

"당시 21세 때 서울 영등포 봉천동 산 101번지 시유지, 시에서 관리하는 땅을 퇴직금 타서 매입했습니다 (중략) 그 땅에 작은방 1칸 부엌 1칸 집을 지었는데 옆쪽으로 장마철에는 물이 폭포수처럼 내려왔어요. 위험지역이라고 시청직원이 와서살지 말라고 했지만 갈 곳이 없어서 비 오는 날이면 밤에 잠을 못자고 비가 그치면 잠을 자곤 했어요." 

"봉천동 산 101번지에 살았습니다. 남편은 대방동에 있는 국정교과서에 책 만드는 국영기업체에 취직이 돼서 아이들 잘 키우고 있었습니다." 
p112

"갔다오니 큰 쌍둥이가 봉천극장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어요.교통도 불편하고 했지만 매일 땅값이 오르는 것을 보고 봉천동 작은 집을 팔아가지고 안산 한 필지를 매입했어요. 그때 안산에 땅을 매입했으니까 봉천동 시유지 집을 팔면 이사하고 싶어서 부동산에내놨더니 기회가 와서 80만원에 집을 팔고 안산 반월공단 주택지로 무작정 이사를 했어요." p113

나는 봉천동에 산다, 조경란

지은이: 조경란
발행일: 2013년 10월 18일 초판
펴낸곳: 아시아

"봉천동의 행정 변천을 살펴보면 이 지역은 원래 서울시 조례 제276호에 의해 영등포구 관할에 속했다. 봉천동이 관악구에 속하게 된 건1973년의 일이다. 나는 1968년도에 태어났다.내가 세살 무렵 아버지는 영등포에서 봉천동으로 이사를 왔다. 나의 본적은 '봉천동 산 1번지'라고 되어 있다. 

봉천동 산1번지는 봉천동에서도 최고로 높은동네다. 그러니까 엎어치나 메치나 나는 처음부터 봉천동 키드였던 것이다." p3-4

"아버지가 처음 봉천동으로 이사를 왔던 무렵에는 이 일대가 온통 저습 지대의 계단식 논이었다고 한다. 야산은 깊고 험했으며 나무들이 빽빽했다." p4

"내가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선배는 한겨울에 저 위쪽 봉천여중 운동장에서 스케이트를 탔던 얘기며 그 맞은 편 봉천극장에서 <도라도라도라>를 봤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는 덧붙였다. 아주 옛날옛날이었어요.봉천극장이 없어진 건 불과 사오년 전이다." 
p32

"봉천중앙시장이 생긴 건 1969년이니 거의 내 나이와 엇비슷하다."p50

봉천동 거리에서 만난 의자, 손세임

지은이: 손세임
발행일: 2016년 2월 24일 초판
디자인 : 손세임

"봉천동에 처음 이사 왔을 때가 2008년이었다. 7년 동안 살면서도 이 동네에 대해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단지 서울에서 월세가 저렴할것 같아서 온 것 뿐이었다. (중략) 사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추억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변하는 것과 변함없는 것들도 있었다." p6

"봉천동에 산지 7년, 이 동네를 떠나려고 한다. 왜 떠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이유가 없어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 전에 봉천동에 대한 기억을 기록할 수 있는 일이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중의 한 부분인 '내가 거리에서 만난의자'일 것 같다." 
p10

"은천교 버스정류장 옆 화장품 가게와 CU편의점 사잇길로 올라가면 청년들이 운영하는 술집이 있었는데, 혼자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젊은 여성들이 자주 있었다. 가게 사장들과자연스레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도 가보고 싶게 했다." p22

"다가구주택이 모여있는 우리집 주변으로 곳곳에 재개발이 되고 있다. 기존의 주택은 사라지고 신축빌라가 하나 둘 생기는 중이고 그 속도가 빠르다. 공사한 지 몇달도 안되 완공이 되었다. 쉽게 짓고 쉽게 부수고 쉽지 않은 이사를 오고 가고를 반복한다." p35

"하나로 약국 맞은 편에는 낡은 정육점이 있었다. 그 앞에는 커피자판기도 있었는데 가끔 한잔씩 빼먹었다.어느 날 정육점 문은 닫았고, 하루 종일 가요가 나오는올레매장으로 바뀌었다. 그 매장 역시 문 닫았고 조용해졌다.이제 그 곳은 어떤가게로 대체가 될까?"p45 


서울대 사진집단 선언 전시회 카탈로그(1988)

[ 전시설명 ]
서울대 대학생 사진동아리인 사진집단 선언은 1987년 만들어졌다. 사진집단 선언은 사진을 단순한 미적 취미 활동의 수단이 아닌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문화예술운동의 장르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 카탈로그는 1988년에 있었던 네번째 현실과 사진전의 카탈로그다. 

이 전시회는 서울대 인근에 있던 봉천동을 중심으로 한 도시빈민운동에 사진가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사진집단선언은 사진운동을 개인의 활동이 아닌 집단적 활동으로 이해하려 했다. 일반적대학 사진 동아리의 전시회에서 개인의 이름을 걸고 사진들을 전시하는 것과는달리 사진집단 선언의 전시회에서 사진을 촬영한 개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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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국가는 세대적인 유전빈민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텅빈 쓰레기 밭, 멀리 내다보이는 아파트촌."
"이 편지를 드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동네에는 놀이터가 없기 때문에 놀곳이 별로 없어요.(중략) 시장님 그리고 또 한가지 부탁은 우리 뒷산에 있는 쓰레기를 좀 치어주세요.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파리가 끼어 들어요. 1988년 8월 6일 토요일 현숙 올림 " 

"문화학교 선생님의 말씀에 아저씨가 서울의 땅을 가지고 있대요. 이넓은 서울의땅을 사셨다니 놀랐읍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서울 시청장 아저씨의 얼굴이 생각나내요.(중략) 하지만 아저씨 그 주택들보다도 봉천동 뒷산이 더 좋아요. 아저씨 좋은 뒷산에 와 보셨나요. 우리들은 가난하지만 그렇게 주택들에 사는 사람들보다 자연의 부자에요.(중략)"

사진, 내용출처: 영남대학교 주형일교수 다음블로그 
https://url.kr/Pf1u9v

도련님, 아프시면 수프라도 좀 드세요.

지은이: 최철호
지은이 소개: 1969년 봉천동에서 태어났다. 관악초등학교, 봉천중학교, 영락고등학교를 다니며 봉천동 산동네 토박이로 살았다.
발행일: 2017년 5월 19일 
펴낸곳: 이매진
키워드: 도시빈민, 영림시장, 판잣집, 서울대, 150번버스

"1978년 겨울, 여전히 박정희 시대였고, 봉천동 산동네 판잣집은 늘어갔으며, 판잣집 수가 늘어나면서 우리 반은 기어이 80명을 돌파하고 말았다...(중략) 바야흐로 농촌이 해체되고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도시 빈민이 무럭무럭 늘어나는 결정의 시기였다" .p36

"동네 뒷산은 민등산이다. 나무는 거의 없고 황토만 벌겋게 드러나 있어서 그냥 '똥산'이라고 불렀다. 똥산에서 30분 정도 더 들어가면 제밥 나무가 있는 산이 나오는데, 꼭대기에 헬기 착륙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비행기 산'이라고 불렀다. p51

"석유가게는 집에서 아주 멀었다. 산동네를 한참 내려와 버스가 다니는 영림시장까지 나가야 했다." p56

"그 때 동네에 다닌 버스는 150번과 333번이었는데...(중략) 봉천동에서 북가좌동까지 운행하는 버스로, 내 목적지는 광화문이었다." p59

"지하철2호선이 막 개통된 때도 집은 봉천역이 가까운데 일부러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 걸어 다닐 정도였다."p135

"산동네에서는 불이 가장 무서웠다. 대부분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이라 작은 불에도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다. 골목이 좁아 소방차가 들어서지도 못했다."p142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초에 봉천동 아이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민둥산과 길에서 주웠다." p150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한 달에 평균 한 명꼴로 전학을 왔다. 대신 전학 가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학기 초에는 70명으로 시작한 아이들이 겨울 방학쯤 되면 80명 정도로 늘어났다. . . 바야흐로 박정희 정권의 저곡가 정책탓에 농촌 해체가 정점으로 치닫는 때였다. 여기저기서 헐값 노동자, 곧 도시 빈민이 무럭무럭 늘어 났고, 그 한복판에 봉천동 산동네가 있었다." p179

"변두리동네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집마다 별명이 붙었다. 우리집은 최상사네, 동네에서 유일하게 서울대에 들어간 재중 형네는 '서울대집'으로 불렸다. 가장 특이한 별명을 가진 집은 '피아노집'이다." p196

서울 토박이의 현대사 여행

지은이: 김기선
지은이 소개: 1940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구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출생

발행일: 2013년 1월 18일 
펴낸곳: 희망사업단
키워드: 봉천리, 벼농사, 야채농사, 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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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고향에서 살고 있다. 우리 동네의 옛 지명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였다. 원래 우리 증조부께서 사시던 시절에는 한강 이남의 한적한 시골 동네였다. 우리는 바로 이 봉천리에서 4대째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봉천동 494-4번지가 우리 집안의 주소이다. p22

우리집안이 이곳에 정착한지는 약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증조부께서 총각시절인 19세기 말엽, 아마도 1880년대 정도로 여겨진다. 인천에서 이곳으로 오셔서 현재 신봉초등학교 인근 지역에 터전을 마련하셨다. 왜 이동네로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산중턱에 논, 밭이 있었던 이곳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현재의 방배동 지역에 사시던 증조모와 결혼하여 살림을 차리셨다. 

증조부께서는 작게 농사를 지으시며 겨울에는 한강에서 얼음을 떠서 팔고, 과천서 땔나무를 해서 종로에 내다 파시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다고 한다. 당시 우리동네에는 7,8세대 정도가 듬성듬성 살고 있었다. . . (중략) 주로 우리는 벼농사와 야채 농사를 했고 고구마, 토마토 등을 많이 심었다. 고구마를 수확하면 이후에는 배추, 무 등을 재배해서 산 넘어 노량진 쪽에 내다팔곤 하였다. p30

일제시대가 되면서 많은 면적의 토지가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 우리 증조부께서도 여러운 시절을 보내셨던 것 같다. p31

해방이후에도 서울로 인구이동은 계속되어 우리 동네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또한 산 넘어 상도동, 노량진에는 일본 사람들도 살고, 한강변에 노량진시장도 들어서서 경제적 유동성이 지역에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산 넘어 노량진 시장에, 생산한 농산물과 산림자원 등을 우마차로 실어가서 판매하여 적잖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p34

서울도심(4대문인근)을 제외하고 주변이 다 농지였던 시절이었다. 서울이 확대되기 이전 우리 동네도 경기도 시흥군이었으니 그때와 지금의 서울은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한창 때 우리집에서는 고구마 농사를 많이 지었다. 이 지역에서 고구마 농사가 참 잘되었고 맛도 좋았다. 옛날 우리집 에서는 사과 궤짝으로 200짝 정도를 사랑방에 쌓아두고 종자로 삼았다. 집 주변에 땅이 많아서 5~600가마씩 농사를 지었다. 수확이 끝나면 우리는 영등포 시장으로 내다 팔았는데 수입이 괜찮았다. 우리집에서 고구마를 심으면 고양, 시흥, 평택, 과천 등지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기 위하여 종자순을 사러 오면 그것을 백 개씩 묶어서 팔기도 했다... (중략) 66년 이후에는 서부 이촌동에서 한강둑이 터진다는 소식에 대거 주민들이 이전을 하여 난민촌 비슷한 것이 우리 동네에 형성되었다. 정부에서는 큰 군용텐트를 짓고 한 가족당 8평의 공간을 배정하였고, 그 안에 흙벽돌로 경계를 짓고 4,5가정이 텐트 안에 살았다. 공동화장실이 동네 개천 인근에 세워지고 개천에서 목욕, 빨래 등을 하며 지냈다. p35

지금은 우리집터 300평 정도에 상가 건물을 짓고 그 건물 3층에 살고 있지만 옛날에는 시골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방이 6,7개 정도(안방, 건너방, 사랑방 등) 되고 집안에는 외양간도 있었다. 소는 한마리 정도 키웠는데, 밭농사를 위하여 키운 것이다. 창고와 움막도 있었다. 집안에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물은 센물이라서 빨래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빨래는 주로 동네 옆 개천에서 했던 시절이었다. P36

당시 우리 동네에서 갈 수 있는 학교는 흑석동에 있는 은로 초등학교, 상도동에 새로 설립된 강남초등학교, 아니면 신길동에 있는 우신초, 그리고 내가 입학한 신대방동에 새로 생긴 문창초등학교로 갔다. P44

문창초 부지는 해방 전에 기름 공장이었는데 45년에 해방이 되면서 강습소처럼 시작한 학교였다. p44

지금이야 이 길이 전부 주택가와 차도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산과 시내물이 흐르는 산동네 시골길이었다. p45

우리집 주소는 봉천동 339번지, 한재준

지은이: 한재준
발행일: 2010년 7월 15일 
펴낸곳: (주)에세이 퍼블리싱
키워드:  지하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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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얼마 전 우리동네에도 지하철역이 들어서면서 할머니들은 다들 땅 속으로 가는 신기한 기차를 타보기 위해 우리 집에 모인 것이었다. 내가 5학년이 되던 해 우리 동네에 그것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하철역이 들어서게 되었다. 땅 속으로 기차가 다닌다니. 신기할 만도 하고 또 이런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이 집 가까이에 생겼다는 것이 할머니들에게는 경사라면 경사일 테지만 역이 들어선 후 어째서인지 다른 동네어른들은 집값이 오른다며 다들 한탄을 했다. "여기는 시유지라 남들 좋은 일만 하는 거지 뭐." . "그러게 말이야 우리야 뭐 혜택을 볼게 있나"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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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유지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말로는 지금 우리집이 있는 이 동네가 나라 땅이라고 했다. 아주 옛날에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집을 지으며 살기 시작했고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어느덧 지금까지 시간이 흘러온 것이란다. 또 언뜻 이해는 안갔지만 이것이 불법이어서 동네가 발전이 되면 될수록 우리에게는 더 안 좋을 수도 있으며 언젠가는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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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가 지하철역에 도착한 우리는 촘촘히 놓인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사람이 지날 때마다 빙그르르 도는 차가운 느낌의 막대달린 문을 통과한 후 한 번 더 계단을 내려가자 그곳에 기차가 다니는 길이 놓여 있었고 땅 밑에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p146

장마철이 오면 언제나 우리 집은 한바탕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 . (중략) 푸른색 플라스틱슬래브로 만들어진 우리 집 지붕 위에 내리는 비는 마치 캐스터네츠를 연주하듯  '틱틱 톡톡' 소리를 내며 지붕 위에 내린다. p152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온 덕분에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 왔을 때는 다행히 상도동 밤골이라는 곳에서 방 한칸에 부엌 하나 딸린 오천원짜리 전셋집에 살 수 있었다. p176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