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기사자료

서울 원당초등학교, 원당동산

"신학기를 맞아 우리 학교는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본교 학구이던 봉천2동에 새로 봉현초등학교가 신설됨에 따라 많은 어린이가 새 학교로 가게 될 것입니다. 원당초등학교 라는 울타리 안에서 한 식구로 살던 우리들이 각자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당초등학교 1972년 12월 설립 인가 - 2003년 서울 봉현초등학교로 분리(446명)
봉현초등학교 2003년 5월 개교 

자료제공: 원당초 졸업생 

봉준호 감독, 영화 <백색인>의 배경 장소, 봉천동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인 W는 어느 날 출근길에 잘려진 검지 손가락 마디를 발견한다. 그는 손가락의 정체가 무엇인지 주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고에 의한 것인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손가락은 희귀한 장남감 정도에 불과하다. 얼마후 TV에서 작업 중 손가락을 잃은 산업재해자가 회사 사장을 때려 전치 6주 사고를 냈다는 뉴스가 보도된다. 다음날 회사 출근길, W는 동네 개에게 손가락을 던져준다.
(2014년 제19회 인디포럼)

[내용출처: 다음영화, 백색인]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6215

서울대입구역 상권 분석 사이트

정확한 작성시기(2000년대 초반 추정) 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봉천사거리에 위치한 '에그 옐로우' 건물 공사 중 사진과 인근에 형성되어 있는 초기 상권 
사진이 실려 있어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참고 링크: 
http://www.sangganews.com/CP/NAVER/area_analysis/seouluni/seouluni.htm


YMCA 봉천동 근로여성회관 건축 계획

문서명: 1975년 서울 YWCA 봉천동 근로 여성 회관 건축기획자료
내용: 봉천도 근로 여성 회관 건축 계획서, 사업계획서, 년차 계획에 따른 예산 초안, 봉헌예배 내용
생산연도: 1974년
자료출처: YWCA아카이브 홈페이지,
https://ywca-archive.or.kr/items/show/9503
참고내용
- 건축목적: 급속도로 발전하는 남부서울의 중심지가 될 봉천동에 이미 심어진 YWCA의 씨를 여터가지 회원 활동을 확장하여 성장하게 하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저소득 근로여성의 기술교육을 실시하여 그들의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건물의 진행에 따라 안식처를 마련하여 생활교육을 병행하면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여 지역사회 발전과 사회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봉천동 삼만단지

삼만단지 추정 위치: 
현) 봉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과 관악중학교 사이 부지
참고사이트: 

1)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npnw/220060323132

2) 다음 블로그
https://url.kr/l8wcd3

"봉천 11동은 관악산 상봉약수터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산아래 동네로 북향이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잘 녹지않기는 했지만 30대의 기운으로 아침 일찍 상봉약수터까지 30분 산행을 하고 내려와 출근을 하기도 했었다. 하여튼 봉천11동에서의 생활도 나름 행복했었다. 바로 건너편에 교회 예배당이 있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주일날이면 남부순환로 큰길을 건너 다녔었다. 그러던 차에 네째의 출산을 앞두고 조금더 힘을 써서 남향의 봉천6동 삼만단지 끝자락에 위치한 덕성연립 가동 201호를 구입하였다.이곳 산 너머는 당시로는 봉천동 달동네로 유명한 곳이었다." 

사진출처
1) 구글지도, 삼만정육점
봉천동 101-3번지  ,2018년 3월, 
2018년12월쯔음 해당 건물 철거 신축

2) 네이버지도, 삼만빌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100-436 ,2021년 1월 현존

"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집은 멀리 이사를 갔다. 성동구 행당동에서 관악구 봉천동으로다. 봉천동에서는 아버지의 큰 여동생인 큰 고모가 사셨는데 멀리 대구로 이사 가시고 작은 고모가 또 봉천동에 살게 되었다. 우리집도 작은 고모가 사는 봉천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중에는 아버지의 남동생이며 나한테 작은아버지인 삼촌까지 봉천동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 동생들이 모두 봉천동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봉천동(奉天洞), 한자 뜻이 멋지다. 하늘을 받드는 동네다. 하늘과 가까운 높은 봉천동 바로 아래 동네였다. 봉천동보다 더 어마어마한 동 이름이 있을까? 내 천(川)을 쓰는 인천(仁川), 강원도 춘천(春川), 충청북도 제천(堤川)보다 하늘 천(天)을 쓰는 봉천동은 이름의 스케일이 크다. 특히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는 전라도의 순천(順天)보다도 볼륨이 크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봉천동으로 이사를 간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봉천동과 가까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길 바라셨던 것이다. 그것도 서울대 치대를 가길 바라셨다. 아마도 서울대 치대에 가면 졸업하고 돈많이 버는 치과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망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그런 이유들… (중략)"
_
해당내용은 2021년 2월 21일자 인저리타임에 게재된 글입니다. 
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조기현의 ‘몫’] 봉천동과 짜장면

"최근 봉준호 감독의 1994년 첫 단편영화 <백색인>을 보고 찾아가게 됐다. <기생충>이 여기저기서 큰 상을 타니 한 방송사에서 봉준호의 시작을 알리는 <백색인>을 소개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영화 제목을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영화는 화이트칼라 남성의 무탈한 일상과 손가락이 잘려나간 블루칼라 남성의 삶을 유비한다. 계급적 유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주는 공간을 촬영지로 삼았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관악구 봉천3동이다. 숭실대입구역에서 봉천고개로 올라가면 언덕배기에 아파트가 솟아 있고,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왼편에 주택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사방이 아파트로 둘러쳐져 있지만, 영화 속 그곳은 아파트와 달동네가 선명하게 갈라져서 공존하는 모습이다.

나는 아파트 아래 주택가에서 나고 자랐다. 내가 알던 골목길이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흥미와 반가움을 넘어 어서 가야겠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영화는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봉천동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청림동’이라는 새 이름으로 갈아끼운 다른 곳이 되었지만.

날을 잡아 동네 곳곳을 쏘다녔다. 골목길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기억을 찾아다녔다. 그러는 사이 집주인들의 재개발 찬성과 반대 전단을 두툼하게 두른 전봇대가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찾은 그곳에서 나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갈등과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줄 것 같은 추억 사이를 오갔다. 이런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감각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철지난 향수가 되어버릴 것이었다. 골목길을 걷는 내내 곧 허물어질 그곳의 운명과 공간에 얽힌 추억의 허약함과 세입자 처지의 사람들의 행방을 고민하며 자주 길을 잃었다.

영화처럼 가난과 부가 각자의 모습을 드러내며 공존하는 풍경도 분에 넘치는 시대가 됐다. 가난은 더 꽁꽁 숨겨지거나 아예 외부로 추방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옛날 봉천동을 그리움에 젖어 떠올릴 만큼 무탈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수입이든 주거든 여전히 불안정할 따름이다. 어쩌면 나를 이곳으로 이끈 동력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잡지 못하는 시대의 불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억의 관대함은 때때로 현실의 불안을 은폐하기도 한다. 과거의 추억을 더 나은 현실을 위해 쓸 수는 없을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도 공존을 위해 짜장면 한 그릇을 배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봉천3동의 마지막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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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내용은 한겨레에 실린 사설,칼럼 내용을 업로드 한 것입니다.
내용 출처 사이트: 2021년 3월 1일자, <봉천동과 짜장면>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4799.html
사진: 직접 촬영 

봉천2주택 개량재개발구역 변경결정 지적승인 및 고시(고시 1995-26)

위치: 관악구 봉천동 산94번지 일대
추진경위
1973.12.1 재개발구역지정
1974.12.6 지적고시
1984. 4.24 사업계획결정
1992. 12.8 사업계획변경결정
1994. 2. 24 사업시행인가: 2-2지구
내용출처: 서울시 정보소통광장
https://opengov.seoul.go.kr/rms/384851
참고도면

봉천2주택 개량재개발구역 변경결정 지적승인 및 고시(고시 1995-26)

위치: 관악구 봉천동 산94번지 일대
추진경위
1973.12.1 재개발구역지정
1974.12.6 지적고시
1984. 4.24 사업계획결정
1992. 12.8 사업계획변경결정
1994. 2. 24 사업시행인가: 2-2지구
내용출처: 서울시 정보소통광장
https://opengov.seoul.go.kr/rms/384851

봉천 2-2주택 개량 재개발 구역 내 도시계획 관련 도면

문서명: 봉천 2-2주택 개량 재개발 구역 내 도시계획 시설(학교)결정 (봉천동 산94번지 일대)
구역명: 주택개량재개발 봉천 2-2구역
위치: 관악구 봉천동 산94번지 일대
도시계획시설 결정 내용: 국민학교 신설
생산일자: 1993년 12월 20일
자료출처: 서울시 정보소통광장
https://opengov.seoul.go.kr/rms/377649

봉천 2-2주택 개량 재개발 구역 내 도시계획 시설(학교)결정 

문서명: 봉천 2-2주택 개량 재개발 구역 내 도시계획 시설(학교)결정 (봉천동 산94번지 일대)
구역명: 주택개량재개발 봉천 2-2구역
위치: 관악구 봉천동 산94번지 일대
도시계획시설 결정 내용: 국민학교 신설
생산일자: 1993년 12월 20일
자료출처: 서울시 정보소통광장
https://opengov.seoul.go.kr/rms/377649

봉천동 지도

지도출처: 서울역사편찬원, 동명연혁고 XIII (관악·동작구편)
발행일자: 1989년 2월 15일
키워드:  
1) 삼육재활원
2) 아파트 : 해바라기 아파트, 복권아파트, 대도아파트, 군인아파트, 서울대 교수아파트, 장미원아파트
3) 시장: 봉천시장, 현대시장, 봉일시장, 봉천중앙시장, 영림종합시장, 원당종합시장
4) 극장: 봉천극장

우리마을상권분석리포트 (1) 관악구편_시의원에게서 듣는다

1) 관악구 상권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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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에 오래 산 사람들끼리 헤어질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올라가세요~“라고. 관악구는 관악산,청룡산,삼성산 등 산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시기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산 중턱에 모여 살았는데 귀가하는 길이 산에 오르는것이어서 이런 인사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관악구 상권은 산 아래 물이 흐르던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습니다. 봉천사거리, 신림사거리, 난곡 등이 전형적인 구 상권입니다. 그러다가 지하철 2호선과남부순환도로 주변으로 상권이 이동했죠. 과거에는현대시장, 봉천시장, 원당시장 등 재래시장 중심 상권이었는데 지금은 교통여건이 편리한 다운타운 중심으로 상권 성격이 변했습니다.“

2) 거주지로의 관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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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관악구가 과거에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저소득층의 베드타운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테헤란밸리, 구로밸리 등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젊은 근로자들의 거주지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주지로서의 관악구의 기능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관악구는 지리적으로 테헤란밸리와 구로밸리의 딱 중간지역입니다. 연구중심의 IT벤처기업의 새로운 집합지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창업밸리를 구축해 지역 내 소비를 활성화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원문출처: 서울경제 라이프 점프
https://url.kr/jh5esm
기사일시: 2020년 9월 28일
사진출처: 직접 촬영
촬영일자: 2018년 7월 15일

봉천동 화운원의 조현호 건축주 인터뷰

Q. 봉천동 토박이라고 하셨는데, 봉천동이란 동네에 대한 이야기도 부탁드려요.
A. 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봉천동에서 살았는데요. 어릴 때 받았던 느낌과 지금 받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제가 어릴 때 서울대 앞은 논이었고, 친구들이랑 개구리 잡으러 다니고 그랬었어요. 그때만 해도 변두리였고, 못 사는 사람들이 정착한 가난한 동네, 산동네, 달동네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큰 도로나건물들도 없었고, 지금의 낡은 3,4층 건물들이 그 당시엔 제일 큰 건물들이었어요.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통이 좋아지고,주변에 학교가 많아지다 보니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특히 원룸에 거주하는 젊은사람들이 늘면서 동네 분위기가 활기차게 변하기 시작했죠. 그런 면이 좋으면서도,한편으론 예전에 누가 누군지 다 알고 서로 인사하며 지냈던 정감 있던 모습이 그립긴 합니다.


인터뷰 전문보기: https://url.kr/z8md36
내용출처: 별집부록, (별집공인중개사사무소 제공)
봉천동 화운원의 조현호 건축주 인터뷰
사진출처: 별집부록(별집공인중개사사무소 제공)
키워드: 서울대 앞은 논, 개구리
참고사항: 해당 내용에 대한 공유는 별집공인중개사사무소의 동의를 구하였습니다. 

기억 속의 집_봉천동 L씨댁

" 1970년대 봉천동-서울대입구역 근처-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신 분입니다. 현재 기억 속의 집은 사라지고 없어서, 언제 건축되었고, 사라졌는지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는없었습니다. (중략) L씨의 집은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봉천동 근처에 그 당시에동일한 형태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이 있었습니다. 빌라의 한 형태인데, 1~2층이 한 집씩 쓸 수 있게 하여, 옆으로 연접하여 집들이 붙어 있는 형태입니다. 유럽의 타운하우스 형태이기도 합니다. 이 당시 이후에는 이런 형태의 집은 건설되지 않아, 남아있는 것이 많이 없습니다."

" 1~2층을 같이 쓰는 집이 3호가 연접하여 붙어 있는 형태입니다. 집의 정면은 거의 서향을 바라보고 있고, 서쪽의 큰 골목에서 2M가량의 좁은 필지내 공간을 통해서 들어가면 집이 있는 형태 입니다."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좌측으로 갈색의 원손잡이가 음각으로 파여졌던 슬라이드 문을 가진 포마이카재질의 장농이 있었습니다. 우측을 바라보면 시선 좌측으로 단스라 옷가지 넣을 수 있는 5층 정도 수납장과 그 옆에 흰색 200리더가 안될껍니다. 금성 냉장고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좌우로 여는 갈색 슬라이드문을 가진 흑백티비가 있었구요. 안방은 부모님이 사용하셨구요."

"부엌 옆에 방은 꽤 컷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때문에 서울대생 누나 형들이 하숙을 했는데 모르는게 있어서 물어보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집과 관련한 사건은 격동의 80년대 초반을 대학가에서 살아서인가 최루탄 냄새를 항상 맡고 독재타도 군부독재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항상 등고 살았고, 진압이 시작되면 대학생 형들이 골목으로 도망다니며 담 넘어 다니고, 전경들이 죽어라고 쫓아다니던 생각도 나구요..."

 "80년대 초반인가.. 대홍수 났을 때 옥상에서 2층 베란다로 물이 폭포처럼 넘쳐 흐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잘 자라는 여주를 심어서 마당 담벼락에서 2층 베란다로 줄을 쳐서 타고 올라오게끔 하고 그 그늘 밑에서 자랐습니다.옛날집이라 욕실이 없어 한겨울에 마당에서 씻어야 하는 것이 큰 곤욕이었고, 1층 평면도 마당 구석에 외부욕실을 강남으로 이사가기 전 85년인가 만들었는데, 불법개축이라고 해서 한참 실갱이가 있었습니다만 아버지가 어찌 하셨는지 이사할 때까지 철거하지 않고 욕실대용으로 썼지요." 


글 전문보기: https://url.kr/qdlksz
* 봉천동과 연관성이 깊은 내용만 게재하였으니, 글의 전문을 보려면 해당링크를 참고 해주세요.
키워드: 서울대생 누나형들의 하숙, 최루탄냄새, 독재타도 군부독재, 전경, 대학가, 대홍수, 금성냉장고, 흑백TV
내용출처: 건축과 미술, 오래된 것이 함께 하는 여행 네이버블로그
참고사항: 블로그 운영자의 동의를 구하고 글을 공유합니다.

봉천동 지역

"집살사람많이몰려 평당12만원짜리도"

4~5년전 한강변의 수재민 3천6백세대가 현재의 봉천극장 맞은편(산 81번지)에 정착한후 잇따라 여의도·종로·청계천변의 철거민이 집결되어 지금은 1만5천여세대에 약10만명의 대 인구를 가진 지역. 시내중심지에서 이곳까지는 버스로 40~50분이 걸린다.

본래 수재민이 자리잡은 산 81번지 일대는 대부분이 시유지이지만 봉천극장 주변을 비롯하여 버스종점부근 및 은천국민학교부근(봉천동1백2번지)에는 사유지가많다. 이 지역엔 전반에 걸쳐 공대지가 많은데 대규모의것은 매매가 힘들지만 40~50평짜리는그런대로 매매가 된다고한다.

현재 이지역의 번화가라 할수있는 봉천극장앞 시장상가 대로변은 평당12만원까지 홋가하고 있으며 부근 주택지로서는 상급지가 평당2만5천원,하급지는 1만5천원으로 은천국민학교 부근도 이와 비슷한 시세. 그러나 극장앞 대로변은 평균5만원정도.

버스종점부근의 상급 주택지가 평균2만5천원, 중급지는 2만원,하급지는 1만원에서부터 7~8천원짜리도있으며 종점 부근에 신축 중인 시장 안에는 평당9만5천원에 예약된점포도 있다. 봉천동 지역에서는 다른 변두리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전셋집을 구하는 사람보다는 60~1백만원짜리 집을 사고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이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공동수도를 사용하고 있으며 하수도 시설이 미비하고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데다 운행 차량이적어 교통이 불편한편이다.

◎버스종점부근
주택
▲대40평건18평 융자70만원 입주금1백20만원▲대40평건14평 융자50만원 입주금1백20만원
대지
▲50·60·1백평 주택지 값평당2만~2만5천원▲4백·5백·6백평전답 값평당6천~6천5백원.
임야
▲3천·5천·1만평값평당2천~4천5백원(이상 버스종점「대통사복덕방」제공 695111교환138번)

◎봉천극장부근
주택
▲대30평건16평 값80만원▲대40평건18평 값1백20만원▲대16평건15평 값50만원▲대16평 건30평2층값80만원▲대40평 건18평(사유지)값1백20만원▲대40평 건18평값1백80만원▲대16평건16평 상가 값2백80만원▲대26평건26평상가값3백30만원▲대22o평건16평 값2백만원▲대25평건14평 지서뒤편값90만원
대지
▲29평 값평당1만5천원▲88평값평당 3만2천원(극장옆)▲대66평 극장앞 값평당 5만원(이상 봉천극장앞「대원사 복덕방」제공)


내용출처: 1969년 7월 5일자 매일경제,
https://url.kr/1dqm82
키워드:  봉천극장, 공동수도, 하수도시설 미비, 산81번지

다큐멘터리, <봉천동 이야기>

제목: 봉천동 이야기
유형: 다큐멘터리
감독: 서명진
제작연도: 1997년
상영시간: 50분
제조사: 푸른영상
줄거리: 이 작품은 철거민의 '투쟁'에 초점을 맞춰 기록했던 대부분의 작품에 비해 철거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주민의 갈등과 화합, 즉 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가는지 그 과정을 그린다. 봉천동 주민들의 생활을 따뜻한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작품내용
다음의 이야기는 지난 1년 동안 봉천동 철거과정을 촬영하며 기록해 놓은 글이다.처음에 나는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주민들의 철거싸움을 지켜보기 위해 일정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촬영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난 주민들의 이야기와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주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주대위 사무실에서 보낸다. 사무실에 있다보면 아줌마들이 남편에게 맞은 얘기, 구박당한 얘기를 재밌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그 얘기들에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익숙해졌다. 봉천동에 살고 있는, 가정을 갖고 있는 여자들의 대부분은 과거에 한번쯤 아저씨의 바람과 폭력에 시달렸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것을 으례 한번쯤은 그럴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술 좀 그만 먹으라고 싸우면서도 그 속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담겨져 있고 사랑타령을 부르는 어느 아저씨의 노래속에서 그들의 사랑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서울대에서 장터를 벌이기도 하고, 5월 노동절 대회에 참여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나가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민들에게 있어 주대위 활동은 단체 생활에 대한 경험, 감투를 통한 신분 상승, 성격변화, 공동체 생활에 대한 즐거움등을 안겨다 주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공동체 생활속에 주민들은 작은 불만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총무님의 학생을 다루는 듯한 말투에 기분나빠하기도 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여자분들이 아저씨를 데리고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종종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집행부가 가시적인 결과물은 보이지 않고 공가(空家)만을 자꾸 내줌으로써 나중에 강제철거를 당하는건 아닌지 불안해 했다.

어느덧 주민들과 나는 함께 울고 웃고 고민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과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느꼈다. 카메라라는 벽이....

주민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몇몇 주민들은 나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주대위 활동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과의 친밀함은 카메라를 쉽게 들지 못할 이유이기도 했다. 활동하면서의 고민과 개인적인 갈등을 찍고 싶다는 생각 이전에 사적인 얘기를 나한테 털어놓는데 그것을 카메라로 포착한다는 것이 좀 그랬다.....나에게 카메라는 주민들과 친해지게 된 수단이기도 하지만 주민들과 더이상의 친밀함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나돌면서 주대위 사무실에도 겨울이 왔다. 김장을 준비하느라 아줌마들이 바삐 움직이던 어느날, 집행부에 대한 내부적 불만이 드디어 부위원장과 백수남씨의 싸움을 일으키게 했다. 싸움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난 그들의 끝도 없는 욕설과 폭력(?)에 객관적인 입장으로 방관하듯이 찍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카메라를 들이댐으로 인해 싸움이 중단될 까하는 기대는 어설픈 것이였고 그들은 나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채 열심히 싸웠다.
(중략...) 

내용출처: http://docupurn.jinbo.net/works/bongchun.htm
이미지 및 내용출처: 한국영상자료원, https://url.kr/khq82b

봉천천 복개도로 개통

보도제목: 봉천천 복개도로 개통.남부순환도로 교통량 분산
보도일자: 1988년 6월 30일자 KBS 뉴스데스크 
보도시간: 1분 30초
뉴스보기: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680656
참고사항: 1980년대 봉천동의 풍경, 
봉천천 복개구간: 신정1교 - 신도림역 - 대림역 - 구로공단역 - 신대방역 -봉천교 - 원당국교

관악중 마을교과서 

내용출처: 관악중 마을교과서 중 일부 발췌
검색어: 봉천천복개공사시작
파일출처: 2017년 관악마을교과서, https://url.kr/2dajw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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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 3-2 유oo (유○○ 할아버지 전○○ 님)
Q.: 봉천천이 어디예요?
A: 옛날 원당 초등학교 앞 부분에서 원당시장까지 개천이 넓게 있었는데, 거기를 봉천천이라고 했지.
Q: 왜 복개를 했어요?
A: 그때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낙성대 공원이나 이런데가 다 논, 밭이었는데 사람들이 모이고 집을 짓고차가 늘어나다 보니까 도로가 필요했고, 또, 봉천천이 냄새도 심해서 도로로 덮었지.
Q: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A: 글쎄, 기억에 우리한테 물어보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물어봤다고 해도 반대를 하거나 하진 않았을거야. 구청에서 알아서 하겠거니 하지, 요즘처럼 미리 얘기하고 동의하고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관심이 없었는지 기억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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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 인터뷰: 3-3 박oo (박○○ 할아버지)
Q: 옛날이랑 지금이랑 이곳이 어떻게 달랐나요?
A: 옛날에는 지금이랑 많이 달랐지. 옛날에는 저기 봉천천도 있었고 고개쪽 도로도 굉장히 좁아서 2차선이었어. 지금은 4차선이잖아. 길도 원래는 산이었는데 다 깎은거야. 넓히기도 하고. 순환도로도 없었어, 그때는. 길이 포장도 안되고 말할 것도 없었어. 난민촌이었어, 여기.
Q : 옛날에 봉천천이 복개되었다고 하던데 봉천천에 대해서 아시나요?
A : 아, 이게 다 복개한거야. 도로도 다 있지? 그것도 다 복개해서 한거야. 옛날에는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었는데 지금은 다 복개한거야. 도로 아래에는 아직도 물이 흐를거야.
Q: 지하철 2호선이 들어왔을 때 어땠나요?
A : 그거 되는 바람에 좋아졌지 관악구는. 그전에는 교통이 굉장히 나빴잖아. 근데 지하철 들어오는 바람에 편리해지고, 더 좋아졌지 관악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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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 윤oo (윤○○ 할아버지 윤○○ 님)
Q: 관악구에 정착하실 때의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A: 자식들 학교 보내려고 남원에서 서울로 올라왔지. 봉천 11동 쪽에 시장이 모여 있었거든. 그래서 그쪽에서 자리 잡았지.
Q: 서울로 올라오실 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A: 시골에 있었지만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포기하고 서울에 온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지. 자식들 먹여 살려야 되는데 일이 마땅치가 않으니까. 그래도 학교는 제대로 보내야 된다는생각에 서울로 왔어.
Q: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말씀해주세요.
A: 시장 쪽에서 나는 장사일 하고 너희 할머니는 공사장 일손을 도왔어. 사업도 몇 번 했고. 그렇게 돈모아서 여기로(지금 살고 계시는 곳) 집을 옮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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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4) 김oo (김○○ 아버지 김○○ 님)
Q: 관악구에 언제부터 사셨어요?
A: 6살 때 엄마, 아빠 따라 서울로 올라왔지. 벌써 관악구에서 40년이나 살았네.
Q: 봉천천 복개하는 것 보셨어요?
A: 응. 원래 봉천천이 낙성대부터 보라매공원까지 이어져 있었어. 근데 그걸 다 도로로 만들어 버렸어.
Q: 그 전에 봉천천은 어땠어요?
A: 거기서 아이들이 많이 놀았지. 수영도 하고 겨울엔 뚝방에서 구슬치기, 쥐불놀이, 연날리기도 하고. 놀데가 많았는데 복개하면서 아이들 놀 곳이 없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