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검색어: 영등포구 봉천동
2) 기간: 1963년 - 1973년
▶1963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축산단체축사 지으려고 세민백가구 쫓아낼 기세"
황무지를 개척, 무 배추를 갈아 연명해가는 세민들의 삶의 터전에 축산단체에서 축사를 지으려고 하자, 집과 밭을 잃게 된 주민들은 소송을 제기 관계 당국에 진정, 조사가 착수 되었다. 대한축산장려회는 영등포구 봉천동 산팔육의 일, 산구일의 일, 산구일의 사 일대(귀속재산)의 국유임야 사만 오천여평을 대부받아 주민들을 철거시키려는데서 문제가 발단됐는데 이지대는 서울시편입지구(경기도시흥군동면봉천리)로 영등포구 상도동 주택지와 접경 해방직후부터 상도동 주민들과 봉천동 주민들이 밭을 일렀는데 경기도 당국은 62년 12월 31일자로 축산장려회에 이를 대부한것으로 주민들은 “서울시에 편입키로된 바로 하루전에 대부한 경기도당국의 진의를 알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미 일백가구의 세궁민들이 흙벽돌집과 움막, 판자집을 짓고 살아 온터로 축산장려회가 강제철거를 할 기세가 보이자 서울지방법원에 경작지확인소송을 제기지법은 현지 농지위원장의 확인증명을 근거로 농지개혁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지난 6월 24일 가차압처분을 내려 축산장려회 측은 출입금지를 당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장래회측은 주민대부분은 본회취지를 찬동하나 몇주동자가선동하고 있다.주민들을 한구석에 이전시키고 화의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농림부유축산국장의말= 불순한점과 사회적물의를 일으키는일이 있으면 사단법인 인가를 취소하기로 조건이 붙어있다. 그곳에 주택과 밭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양측의 타협을 바란다.
▶1963년 3월 8일자 조선일보 , "유아소사"
유아소사 영등포에불 7일밤 9시쯤 영등포구 봉천동 산구일의 일 김순복씨 집에 불이 일어나 방안에 있던 김씨의 녀 혜자양이 소사하고 처유의랑씨가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었다. 김씨는 품팔이하러 나갔고 어머니 유씨는 이웃에 저녁거리를 얻으러나간 사이에 방안에 커놓은 등잔불이 인화되었던 것이다.
▶1963년 2월 9일자 조선일보, "8백만 그루 심어 푸른 서울로 63년도 사방사업계획 발표"
서울시는 8일 올해에 시행할 사방사업계획을 발표하고 푸른서울을 이룩하기 위해 시민의 협조를 요망했다. 2월부터 시행할 이계획은 구시가지 사십일 개소와 행정구역확장으로 편입된 지구 이십오개소, 이밖에 특수조림지구개소등 모두 칠십오개소가 선정되었는데 이에 드는 예산은 시비칠천만원과 국고보조일천일백만원등 모두 팔천 일백 구십만원이다. 약삼천여정보에 달하는 지역에 리기다 소나무, 잣나무, 오리나무, 아카시아 등 팔백 이십육만 삼천그루의 각종 묘목을 심고 이백팔십사만장의 잔디를 입히게될 이 사업은 시사방관리소직영으로 추진하게 되는데 기초공사 및 파종공사는 2월부터 5월까지 끝내고 개간공사를 비롯한 기타공사는 모두 11월말까지 완성할 예정이다. 이 푸른서울 조성사업에는 연삼천 이백대의 트럭이 동원되고 연인원 사십오만 오천명이 취업케 될것이다. 각 구별 시행지역명은 다음과 같다.
성동구 = 신당동, 옥수동(미라사) 금호동(채석장) 금호동(응봉산)금호동(대현산동편)사근동 (한양대학)중곡동(아차산)천호동 기작동 기여동 자곡동 개포동 대곡동 삼성동성담동
동대문구 = 청량리동(홍릉)답십리동 면목동(아차산)신내동
종로구 = 와룡동
성북구 = 성북동(개간지) 성북동(미락당) 돈암동(아리랑고개)미아동(처당골)정릉동(청수장)상계동
마포구 =창천동(와우산)
용산구 = 삼각지-한남동고개간노변 남산-해방촌일대
서대문구=영천동 봉원동 연희동 홍은동 응암동 녹번동 불광동 수색동 천연동 현저동 영천고개
영등포구=흑석동 상도동(삼개소)대방동 신대방동 개화동 내발산동 하곡동 신정동 개봉동 신림동(이개소)봉천동(이개소)사당동(이개소)서초동 원지동 양화동 본동
▶1963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서울의 신입지구 90개동에 동장 43명"
새 편입지구 구십개동의 행정기구는 사십삼개동사무소를 두고 동장과동서기 한사람씩만을 임명하기로 됐다. 새로 설치되는 동사무소는 보통 몇 개리를 합하여 기존이 사무소가 있고 인구가 많은 곳으로 정했는데, 구 시가지의 동사무소와는 기구 및 관장사무가 훨씬 적은 편으로 태반의 동관장 사무는 출장소에서 맡아보며 출장소와 통반의 중간역할만 하게 된다. 동장은 국민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으로 출장소장이 제청하여 구청장이 임명하는데 현재 인선중이다. 동장의 월 보수는 팔천사백 오십원쯤이다. 서울의 행정구역상 동수는 사백오십칠개 동이며 행정기구상 동사무소 수는 이백구십오개동이 된다.
▶1965년 8월 10일자 조선일보, "무허가 건물 입주재민 5천가구 봉천동천막촌에 이주, 서울시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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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9일 한강수재민중 저지대무허가건물 입주자로서 재입주를 시킬수 없는 약5천가구를 영등포구 봉천동에 천막촌을 지어 이주시키기로 확정하고 금명간 정부당국과 국유지 임대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시당국은 봉천동의 국유지 5만평에다 약 4천만원의 경비를 들여 천막으로 정책주택을 짓기로 한것인데 당초 약 1억 3천만원을 들여 간이주택을 세워 정착키로한 계획은 자금난으로 포기하기로 한것이다. 시당국은 봉천동 이주에 앞서 우선 시내각학교에 수용된 약8천명을 개학전에 딴곳에 옮기기로 하고 자금영달이 되는대로 약 1천장의 천막을 구입, 이주시킬 계획이다. 봉천동의 천막촌은 바닥을 다지고 길을 빼는 등 기초공사관계로 9월말이나 10월초에 들어서야 입주가 가능할 것으로 시당국자는 밝혔다.
▶1965년 10월 17일자 조선일보, "천막속은 벌써 엄동"
천막 속은 벌써 엄동, 망각된 시민 이촌동가수용소 수재민들, 이주희망 꺾이고 환자에 걸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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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의 물난리로 3개월 동안이나 수용소살이를 해오고 있는 3천 9백 가구 1만 9천 3백여명의 수재민들은 당국의 더딘 구호계획때문에 11월 중순까지 한강백사장 너머의 가수용소에서 찬바람을 맞게 됐다. 지난 9월 중순까지 옮기기로 했던 수재민이주계획을 여러가지구실로 미루어오던시보사국은 이제와서 정착예정지인 영등포구 봉천동에 무덤이 많이 널려있어 이를 완전히 이장시킬 11월 중순까지는 이주가 어렵게 됐다고 16일 밝혔다. 그런데 날씨가 쌀쌀해진 16일 동부 이촌동 가수용소에 있는 수재민들의 생활실태를 보면 ‘주민의 절반이상이 이불도 없이 포대기를 덮고 가마니 위에서 새우잠을 잔다’ (1통 11반장 박 노선씨의 말)고하며 이제까지 정기적으로 나오던 구호양곡은 지난 9월 2일과 30일에 15일분을 받았을 뿐, 10월 들어서는 완전히 끊어져 버림으로써 시내로 구걸행각을 다니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했다. (2통 김갑렬씨의 말) 이틀에게 주는 긴급구호는 1백가구에 1가구꼴로 배정량이 한정되어 있어 구호 양곡의 대량 방출을 호소하고 있었다. 기온의 급강하로 환자의 수도 늘어 요즘엔 하루 3~4명의 응급환자가 병원에 이송된다고 파견나은 한강로2가 1동 최점석씨가 말했다.
▶1965년 8월 11일자 경향신문, "수해 입었는데도 수재민 아니라고"
수해 입었는데도 수재민 아니라고 등록증 없는게 이유, 항구구호책서 제외, 용산구 수재민 천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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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시내 각처에 수용되고 있는 수재민을 국민학교 개학을 앞두고 연고지 또는 정착지로 분산이주시킬 방침을 세우고 항구정착지(영등포구 봉천동의 8만평)가 마련되기전까지는 우선 각 국민학교에 수용중인 수재민에게는 각 구청별로 수용 가능지에 천막을 마련, 수용키로 했다. 약1개월동안 시내 32개 국민학교와 19개의 시설에 수용되고 있는 4천 5백 87가구 2만 2천 7백 89명의 수재민중에는 2천 3백 14가구의 1만 1천 2백 52명이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고 있으며 특히 용산구내의 수재민의 경우에는 6백 67가구에 2천여명이 수해이전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 유령주민으로 판명, 이틀은 앞으로 주택등 항구 구호대책에서 제외키로 했다. 서울시 당국은 수재민에 대해 주민등록부와 무허가 건물일제등록시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수재민증을 발부하지 않고 이들 수재민증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항구적인 구호대책에서 제외키로 한것이다. 이와 같은 시당국의 방침이 전해지자 수재민증을 발부받지못한 수재민들은 주거부에만 있던 사람이 이번에 수재민증을 받아 항구구호를 받게 됐다고 말하고 실제로 수해를 당한 사람이 서류상에 빠져 구호를 못받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용산국민학교에 수용되고 있는 수재민들은 3백 27가구 중 80여가구가 수재민증을 발부 받지 못해 항구적인 구호대책을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당국의 서류상에 의한 수재민증의 발부를 재검토 해달라고 진정하고 있다.
▶1965년 9월 30일자 조선일보, "새서울 지상복덕방8. 봉신형"
새서울 지상 복덕방, 봉신형, 신흥주택가 이모저모, 평당2천원의 전원, 시영주택은 30만원, 전세 5만원, 수도 전화없고 시장은 구멍가게, 반이상이 영세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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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남쪽으로 경수가도를 한참가노라면 상도동 동편에 질펀히 퍼진 새마을이 봉신동, 예전 봉천동과 신림동을 한 행정구역으로 하여 봉신동이라 부른다. 광화문에서 12km 합승으로 30분, 버스로는 40분 걸리는 곳이지만 벼이삭이 한창 영글어가는 논밭의 풍경등은 흡사 전원과 같은 분위기. 1천 9백가구 1만 3천여명이 사는 이마을은 한말로 ‘물좋고 공기맑은 조용한 교외’라고 할 수 있다. 주민가운데 약 3분의 2가 농업 또는 상업에 종사하는 원주민들. 나머지는 작년부터 들어선 구호주택과 시영주택의 주민들. 63년 1월에 서울시로 편입된 후 64년에 구호주택 4백 50동, 시영주택 1백동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해왔다. 지금도 민간인인 집장수들이 2천여평의 대지를 다져 30동의 집을 짓고 있다. 값은 완성된뒤 싯가에 따르겠지만 70~80만원 정도 될 것이라는 얘기를. 땅값은 평당 2천원대. 지난해에 지은 집값은 방둘 마루 부엌 변소가 있는 시영주택이 25만원~ 30만원 정도로 전매되고 고방하나에 부엌이 달린 구호주택은 3만원 ~ 5만원씩한다고. 시영주택의 전세값은 5만원 꼴, 방하나엔 2만원쯤간다. 주민들의 자랑은 대단하지만 여기에도 앞으로 더 개선돼야 할 여러문제들이 많다. 먼저 교통사정 - 상도2동 분기점부터 약 1.5KM가 아직도 먼지투성이의 꼬불길. 비만오면 진창이되고, 지난 장마때는 등교학생을 등에 업어 날라야하기까지 했다. 상도동 종점의 버스, 합승이 모두 이곳까지 연장 운행되지만 버스는 30분배차에 3대뿐, 합승은 15분 배차에 3대뿐으로 주민들은 교동난을 겪는다. 몇번 진정은 냈다지만 - 시장이 없어 구멍가게에 의존해야하고, 수도가 아직 안들어와 주부들의 불편은 더해진다. 쓰레기 차분뇨차가 적기에 들르지 않아 냇가에 버리기가 일쑤라고 했다. 지난 8월 파출소는 생겼지만, 전화시설이나 우체국마저 없고, 시설도 없으며 은천국민학교가 하나있을뿐이다.
▶1966년 8월 24일자 경향신문, "소걸음 주택건립"
소걸음 주택건립, 연내로 4만동 짓는다더니, 어파트 5동과 6백동이 고작, 그나마 자금난, 난민용만 9백 50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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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주택건립은 올해 안에 시영단독주택 5백동과 입주자들의 조합구성으로 이뤄질 조합주택 1백동등 모두 6백동, 그리고 3백 20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영세민 [어파트] 5등 뿐이다. 이로써 김현옥 시장이 “금년안에 4만동의 주택을 짓겠다’는 등의 숱한 주택공약은 공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시 당국이 지난 15일 착공한 남가좌동의 조립식주택 5백동의 건립도택지 조성과 자금난등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관계자들이 보고 있다. 다만 제5차 추경예산에 반영되어 대방동과 응암동에 착공한 영세민 [어파트] 5동과 시에서 한동당 18만원씩 융자해주는 면목 뚝섬지구의 1백동의 조합주택 건립만이 확실시됐다. 한편 서울시는 봉천동과 상계동 난민용 주택(부엌 1, 방 1)9백 50동을 짓고 있다. 서울시가 금년안에 짓겠다는 주택과 [어파트]는 다음과 같다. 남가좌동의 단독주택 = 조합신청서를 이미공고했음. 시에서 융자금을 동당18만원씩 주는데 연4%이자, 대지50평에 건평 15~17평. 뚝섬지구조합주택 = 60동분의 조합신청을 받았다. 동당 18만원 융자, 20년 상환, 연 4% 이자, 대지50평에 건평 15~17평 영세민 [어파트] = 대방동에 2동, 응암동에 3동. 동당 64가구를 입주시켜 3백 20가구를 수용한다. 4층 철근으로 방2개 부엌1, 공동변소가 있다. 입주신청은 9월 중순부터 받을예정, 가구당 집값은 20만원 미만인데 가구당 18만원씩 융자해준다. 20년 상환, 이자는 연 4%
사진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66년 2월 20일자 조선일보
▶1966년 02월 20일자 조선일보, "3천어린이들 휴학, 봉천동철거민촌, 거리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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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봉천동 철거민촌에 사는 3천여 취학 아동들은 학교가 멀어 3개월동안이나 학교에 못가고 있다. 이들 3천6백여가구 수재민은 지난해 11월말 서울시청의 주선으로 시유지인 봉천동에 가구당 5.5평의 대지를 할당받고 천막집에 이주했었다. 지난 12월 시교육위원회는 취학연령에 있는 철거민 아동들을 취학시키기 위해 3km쯤 떨어진 은천국민학교와 인근 은로 노량진등 국민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하였으나 학부형들은 학교가 너무 멀어 보낼수 없다고 버티어 거의 취학을 시키지 않고 있다. 수재민 일동은 지난 연말 교육위원회에 봉천동에 가교사라도 지어주도록 요청했었다.
▶1966년 05월 24일자 조선일보, "간이주택 1천 7백동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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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수재민들이 정착해있는 봉천동천막촌에 간이주택 1천7백87동을 세운다. 오는 6월 1일에 착공, 7월 중순까지 다지을 이간이주택은 총 7천 6백 89만원으로 정부와 서울시가 그 절반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자조근로형식으로 구호용 밀가루를 나누어주어 주민들이 직접 벽돌을 찍고 집을 짓게 한다.
▶1966년 10월 11일자 매일경제, 가내공업 센터 일기공식 거행, 봉천동 가내공업센터,일기공식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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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지역개발사업의 일환책으로 시내 봉천동에 총공사비 7백 26만원을 들여 가내공업’센터’를 설립키로 하고 가내공업’센터’의 기공식을 10일 하오 2시 봉천동에서 가졌다. 이공업 ‘센터’는 오는 12월 25일 준공하여 내년 4월부터는 가동할 것인데 인형 자수, 조화, 액자 등 공예품을 제조하여 시판하거나 해외로 수출할 계획으로 있으며 매년 6백명의 기술공을 양성할 예정이다.
▶1966년 11월24일자 동아일보, "수재민 정착지 서울봉천동에, YWCA 사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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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천동에 YWCA사업관이 생긴다. 지난 20일부터 짓기 시작한 이 사업관은 대지 50평(시청제공) 에 부녀자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방을 마련하는데 이집을 짓기전 봉천동의 부녀자들은 자신들에게 정신면의 교양강좌가 필요하다고 요구해왔었다. 이 건물은 미국여성클럽에서 기부해온 45만원의 돈을 기금으로 시청에서 마련해준 대지 위에 6관구 사령부의 원조로 세워진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완공될 것이라고. 이 봉천동은 해마다 물난리를 겪는 한강하류 이촌동에서 정착해온 3천5백세대가 사는 마을이다. 이들에게 이웃과 협조하는 일, 집안가꾸는 일, 고운말씨 쓰기 등을 가르치기에는 대단한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들이 생활의 밑바닥에서 헤어날수 있게 기술교육을 가르치면서 교양면에도 관심을 쏟을 것이라고. 어느 한 기관이 특히 문제되고 있는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교양과 생활문제해결을 위해 주력하는 것은 드문일이라 그 성공여부가 주목된다.
▶1966년 9월 14일자 동아일보,"봉천동에 가내공업센터, 서울판, 봉천동에 가내공업센터,재민기술교육 직장알선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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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재민정착지인 영등포구 봉천동에 오는 10월 3일 가내공업센터를 기공한다. 7백26만원의 공사비 가드는 이 가내공업센터는 공장,제품 보관장, 기술교육장등의 시설을 갖춘 1백 68평의 브로크건물로 12월말께 준공될 예정이다. 서울시는 내년부터 도봉동, 상계동, 응암동, 신양동등에 차례로 가내공업센터를 세워 정착재민들의 기술교육과 직장을 알선할 계획이다.
▶1969년 12월 04일자 매일경제, "신흥지대 봉천동, 공장후보지 산재, 노폭확장이 발전좌우, 임야등 구획정리 시급"
봉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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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이 경기도 시흥군동면 봉천리에서 봉신동이라는 이름으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것은 지난 63년도, 66년 5월 1일에 다시 봉신동으로부터 분할 독립 현재의 영등포구 봉천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면적 7.57km, 세대 수 1만 6천 4백 55에 7만 4천명의 인구를 포용한 곳이지만 아직은 제반 여건이 미달되어 각종 도시토목 사업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지난 66년에 편입 후 수재민들이 집단 이주하고 철거민들이 몰려들어 한때 혼란을 빗기도 했으나 지금은 아담한 주택들이 많이 세워져 신흥도시의 면모를 풍기게 됐다. 논밭과 임야가 즐비하고 각종 공장후보지들이 산재해있으나 시내와 직결되는 도로가 협소해 답보 상태이긴 하지만 현재 공사중인 노폭 20m의 간선도 로만 완공되면 가속도적인 발전을 할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완전개발되려면 현재 10%미만인 상하수도 시설의 확장은 물론 전화 ‘케이블’의 연장과 긴급한 5개지역의 교량 신설문제를 들 수 있으며 천연지대로 방치되어 있는 임야나 하천부지의 구획정리 등의 사업이 시급하다.
▶1969년 07월 05일자 매일경제, "봉천동지역, 집살사람많이 몰려, 평당 12만원짜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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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 한강변의 수재민 3천 6백세대가 현재의 봉천극장 맞은편 81번지에 정착한 후 잇따라 여의도, 종로, 청계천변의 철거민이 집결되어 지금은 1만5천여세대에 약 10만명의 대인구를 가진 지역. 시내 중심지에서 이곳까지는 버스로 40~50분이 걸린다. 본래 수재민이 자리잡은 산 81번지 일대는 대부분이 시유지이지만 봉천극장주변을 비롯하여 버스종점 부근 및 은천국민학교 부근(봉천동 1백 2번지)에는 사유지가 많다. 이 지역엔 전반에 걸쳐 공대지가 많은데 대규모의 것은 매매가 힘들지만 40~50평짜리는 그런대로 매매가 된다고 한다. 현재 이 지역의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봉천극장 앞 시장상가 대로변은 평당 12만원까지 훗가하고 있으며 부근 주택지로서는 상급지가 평당 2만5천원, 하급지는 1만 5천원으로 은천 국민학교 부근도 이와 비슷한 시세. 그러나 극장 앞 대로변은 평균 5만원정도.버스종점부근의 상급주택지가 평균 2만 5천원. 중급지는 2만원, 하급지는 1만원에서부터 7~8 천원짜리도 있으며 종점부근에 신축중인 시장안에는 평당 9만5천원에 예약된 점포도 있다. 봉천동지역에서는 다른 변두리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전셋집을 구하는 사람보다는 60~1백만원짜리 집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이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공동수도를 사용하고 있으며 하수도 시설이 미비하고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데다 운행차량이 적어 교통이 불편한편이다.
▶1969년 09월 16일자 경향신문, "서울특별시장 귀하, 초라한 봉천동 언제 발전합니까?, 비오면 엉망인 험악한 길 승객을 짐짝싣듯 독점버스, 김시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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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얼마전에 시골에서 서울 영등포구 봉천농으로 이사온 청년입니다. 며칠 전 시내구경을 갔다가 엄청나게 변해버린 중심가를 보고 깜짝 놀랐읍니다. 그러나 중심가의 발전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봉천동을 생각할 때 치미는 불쾌감을 누를 수 없었읍니다. 서울의 큰길이라기엔 부끄럽기 한량없는 험악하기 만한 길. 조금만 비가와도 발이 푹푹 빠져드는 골목길은 “부인없인 살 수 있어도 장화없이는 못산다”는 한심스러운 말을 낳았읍니다. 게다가 눈이나 비가 올때면 버스조차 안다녀 상도동 종점에서부터 약 1km를 걸어가야 하는 곳이 봉천동입니다. 너무 불평만해서 죄송합니다만 또 한마디 해야 할게 있읍니다. 현재 이곳에 들어오는 버스는 모두 좌석버스로서 한 회사가 노선을 독점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 버스의 횡포가 말할 수 없이 심해 러쉬아워엔 승객을 마치 짐짝싣듯 마구실어 80여명을 태우고 있읍니다. 주민들이 많은데 비해 버스의 운행대수가 워낙 모자라기 때문에 러쉬아워가 아니더라도 보통 10여명의 승객은 서서다니는 형편입니다. 이래서 승객들은 “이름이 좌석버스지 이게 입석버스와 다를게 뭐냐”고 차비를 10원씩만 내놔 차장과 승강이를 벌이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한층 더 교통난이 심해져 아침 9시가 넘도록 주차장에는 70~80명의 사람들이 차를 기다리는 딱한 실정입니다.제발 증차를 하든지 길을 더 넓혀주든지해주시고 교통순경도 각정거장마다 배치하여 버스의 횡포를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중심가에 살든 봉천동에 살든 다같은 서울시민인데 우리 봉천동주민들만이 이렇게 버림받고 살아서야 되겠읍니까? 시장님의 영단을 기대하면서.(서울 영등포구 봉천동, 나생)
▶1969년 03월 06일자 경향신문, "변두리에 모자촌, 대지 2천여평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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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변두리지역 2천여평을 확보, 모자촌을 세우기로 했다. 6일 서울시에 의하면 1차적으로 시내 봉천동 신사리등 시유지 2천여평에 모자촌을 건립하고 13세 이하의 어린이 2명 이상을 거느린 어머니를 입주시킨다는 것이다.
▶1970년 01월 19일자 매일경제, "수출실적증가위해 운영비융자등건의 봉천동 가공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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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가내공업 [센터]는 금년도가눈썹 및 피즈백의 수출실적을 증가하기 위해
1)숙식대책을 강구 2)교육에 소요되는 전액을 보조 3)센터 임대료를 면세 4)센터운영비를 융자하 줄것여등을 19일 서울시에 건의 했다. 서울시 공예공업협동조합이 수탁운영하고 있는 봉천동가내공업 [센터](영등포구 봉천동 63~5)는 정부시책에 의해 지난 67년 4월 29일 국비 5백61만1천1백원과 시비 5백2만2천5백37원등 모두 1천 63만 3천 6백 37원을 투입하여 대지 6백 82평 위에 건평 6백 48평을 건립했다. 봉천동 가내공업 [센터]는 지난 69년에 가눈썹 [피즈백]등의 제조기능공 1천 5백 1명을 양성하여 8천 8백 24만 7천원의 생산실적을 올렸으며 수출실적은 31만 4천 3백 60달러를 달성했다.
사진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0년 9월 23일자 매일경제
▶1970년 9월 23일자 매일경제, "봉천동 이동시청 집무, 상수도 배수관 부설공사등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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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시청제를 마련한 서울시는 22일 하오2시 영등포구 봉천동에서 주민5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첫이동시청집무를 보았다. 이날 양탁식 시장을 비롯 각국 장급으로 구성된 정책진과 과장급으로 구성된 실무진등이 집무했는데 이날 주민 대표 공명식씨는 봉천교 [현대시장간 상수도 배수관 부설공사]등 12개 하수공사를 해주도록 요청했다. 양시장은 이들 주민들이 요청한 하수공사등에 대해 3천8백여만원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제2차 추경예산에 반영시키기로 하고 실무기술진으로 하여금 현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1970년 03월 16일자 경향신문, "서울대종합캠퍼스, 관악산 일대로 확정, 부지 600여만평 잡아, 연내 최종계혁을 마련, 동양 최대 규모로 부총장제 등 신설, 공대, 농대 등 5단대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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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의 위치가 확정됐다. 정부는 16일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의 위치를 서울영등포구 신림동에 있는 현관악컨트리클럽을 포함한 관악산일대로 확정하고 서울대 종합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서울대종합계획추진위원회를 구성, 국무총리 자문기관으로 둔다고 발표했다. 관계부처와의 협의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최종확정된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부지는 학교캠퍼스 면적이 1백 6만 7천 7백 90평(컨트리클럽 97만 3백 30평, 국유지 임야 1만 7천 4백 60평, 사유지8만평등)이고 학교실습림이 5백 14만 6천 2백 91평등 모두 6백 21만 4천 81평이다. 문교부는 이러한 부지결정에 따라 지난 68년에 수립했던 서울대 종합 10개년계획을 수정, 연내에 매스터플랜을 확정실시키로 했는데 홍문교장관은 농대 의대 공대 약대 치대만은 현 위치에 그대로 두고 문리대등 7개 단과대학과 교양학부를 이종합캠퍼스에 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문교부는 종합캠퍼스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1) 종합계획의 기본정책 2)예산심의 3)교육연구 및 제도의 개선 4) 시설계획등을 맡을 추진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는데 이 위원회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관계부처장관과 가계 저명인사들로 구성된다. 홍문교장관은 이러한 추진회의 구성과 함께 현서울대학교직제도 개정키로 했다고 밝혔는데 개정안내용을 보면 부총장제 기획위원회제도를 신설하고 총장직속으로 서울대 종합계획 담당관을 두는 것등으로 돼있다.홍문교장관은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서울대학교를 양과질적인면에서 동양최대의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문교부는 종합캠퍼스의 매스터 플랜 작성을 위해 전문가3명을 이미 선진제국에 보냈다.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가 들어설 위치는 다음과 같다. 서울영등포구 신림동산56의 1. 산 56의 3, 산 156의 4, 산6, 산7, 산5, 산43, 산42의 1, 산 45, 산46의 1, 서울 영등포구 봉천동 산4,5,6,7
▶1973년 03월 06일자 매일경제, "봉천, 신림동회에 우체국분국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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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구청은 우체국과의 거리가 먼 봉천동과 신림동 사무소에 체당국과 협의 하여 우체국분국을 설치하여 주민의 편의를 덜어주기로 했다.구청에 의하면 신흥지역인 봉천동의 경우 3km나 되는 상도동우체국까지 가서야 전보, 환급수납을 해야하며 신림동은 4km나 되는 대방동 우체국까지 와야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이지역의 주민들은 많은 불편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0년 9월 8일자 경향신문
▶1970년 9월 8일자 경향신문, "남부순환도로 착공, 국도 고속도로 이어, 연내, 신림지구 5km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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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시는 시흥 ~ 안양간의 1호 국도와 서울 ~ 부산 간 고속도로를 잇는 너비 40m 길이 12.6km의 서울남부외곽순환도로를 착공, 내년말까지 착공키로 했다.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3억 3천만원을 들여만들 이 드로는 구로동공업단지 남쪽 끝 ~ 신림동 ~ 봉천동 ~ 사당동 ~ 서초동을 지나간다. 서울시는 우선 올해에 신림구획정리지구안의 5.4km를 개통시킬 예정인데 이길이 뚫리면 강남지역의 개발을 크게 돕게 된다. 또 이길은 앞으로 도심반경 10~15km 를 지나가도록 뚫릴 총연장 85km 외곽순환도로의 일부가 돼 도심순환도로와 함께 교통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진출처: https://url.kr/yq3ji8
*한국주택은행 봉천동 출장소 개점에 대한 것이 기사 주 내용이지만, 약도에 표기된 '봉천극장' 의 위치를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직업별 인구, 서울시 조사 70년 12월 31일 현재 기준
표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1년 1월 11일자 경향신문
출신도별 인구통계, 서울시 조사 70년 12월 31일 현재
표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1년 1월 11일자 경향신문
위 사진) 아직 완전한 도시가 되지 못한 봉천등의 한길은 비나 눈이 조금만 와도 농촌 이었던 옛모습으로 돌아간다.
아래 사진) 반듯하게 닦여 포장까지된 중심가의 한길엔 활기에 찬 모습의 주민들이 넘쳐 흐른다.
사진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1년 1월 11일자 경향신문
▶1971년 01월 11일자 경향신문, "71년의 현장 지도에서만 수도"
터져나온 만원 서울 - 봉천동, 빈부격차 두드러지고 도시속성 그대로, 도시화과정의 단면을 들여다 본다. 타관살이 71% 유동직업 81%, 과열투기의 무대, 땅값만 솟아 현세 인구는 11만 5천, 65년에 난민정착지로 첫 출발,발전과정,소득수준에 따라 유출입 빈번,어두운 전기수도사정
주민생활, 엇갈린 집착, 오늘의 주민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에 따라 5백 50만명의 인구를 지니게된 서울에는 서울이면서도 서울답지 않은 숱한 변두리지역을 안고 있다. 이곳은 아직 서울살림에 익숙해 지지 않은 상경인구와 기존도심부의 저소득층 및 투기가, 그리고 원주민등이 한데 어울려 살며 천천히 서울의 한곳으로 도시형태를 이뤄 가는 곳.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서울 영등포구 봉천동의 이모저모를 파헤쳐 도시화과정의 한 단면을 본다.한강남쪽 상도동을 지나 쇠붙이로된 차량마저 거센 마찰음을내며 숨가빠하는 삼피재에 오르면 관악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큰 마을 하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봉천동, 너비 7.257km2에 2만 2천 4백 97가구 11만 4천 9백 55명(남5만 7천 9백 49명, 여5만 7천 46명)의 인구를 지녀 서울의 변두리로는 제일 큰 곳으로 불리는 신흥촌이다. 63년 1월 1일 서울시행정구역 확장으로 서울에 편입되기 전까지만해도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로 평지라곤 겨우 30%이고 70%가 30~40도의 경사진땅이었던 농촌이었는데 오늘날의 탈바꿈은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우체국 파견소 파출소가 각 1개에 국민학교와 중학교가 각 2개 그리고 극장 탁아소 각 1개 및 고아원 2개가 있는 이곳에 들어선 주택등 각종 건물만도 현재 1만 3천 5백 56동.당초 평당 2~3백원씩이던 땅값이 최고 10만원대에까지 뛰어 오르고 보통 3만원씩에 거래되는 현실은 급격히 팽창하는 서울의 한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 11만 4천 9백 95명의 주민 중 서울출신이 전체의 18%인 1만 9천 7백 74명이고 경기도 출신이 11%인 1만2천6백 71명일뿐 나머지 71%라는 절대 다수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인 점은 서울의 고민을 뜻할지도 모른다.(도표1참조) 그러나 도표2에서 보는 것처럼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극히 적고 노동이 23.7%인 2만7천3백3명인데다 무직이 9.1%인 1만5백2명이고 분류가 불가능한 기타가 48.2%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마을의 고민을 여실히 말해주는 자료이다. 결국 농업인구를 넣어 전체 81%가 도시생활자로서는 적합치 못한 직업을 가진해 힘에 겨운 서울살이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63년 1월 1일 서울시로 편입되기 이전의 봉천동은 원당 탑골 넘말 감나무골 양골 새실 독족골 박자궁 청룡마을 호리목 화다리 당곡등 12개마을로 나뉘어 3백여가구 4천6백38명의 주민이 주로 농사를 짓고 살던 전형적인 도시변두리의 농촌이었다. 서울시에 편입된 뒤 봉신동으로 불리면서 가난한 도시민들이 조금씩 밀려 들기 시작했으나 눈에 뜨일만한 발전은 보지 못채한 농촌의 모습을 그냥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65년 8월 서울시가 현재의 봉천동 산 1~400에 이르는 시유임야 5만평에 한강변 수재민 3천 5백 63가구 1만 5천 2백 80명을 처음 이주 정착시키면서 부터 이곳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서울시는 정착민 1가구당 8평씩을 주고 임시로 천막을 쳐 한천막에 2~3가구씩을 수용한뒤 우물 40개 공동변소 20군데를 만들어 이들을 이곳의 붙박이로 만들려했으나 일부는 땅을 버리고 이탈해갔다. 이 같은 현상을 65년 11월 이곳에 수재민으로 정착한 손두헌씨는 “소나무가 우거진 야산속에 버려진 처지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고 돌이킨다.
그 뒤 66년 5월 1일 봉신동은 2개동으로 나뉘어 옛이름을 되찾은 봉천동은 7.57km2에 4천 9백 41명의 인구를 신림동은 18.25km2에 5천 1백 93명의 인구를 지니게 됐고, 같은해 봉천동의 14만 5천 9백평을 난민정착지로 책정하면서 두드러진 발전을 보게 됐다. 이 때부터 67년 까지의 난민정착 상황은 66년의 강변1로 철거민 4백 68가구 2천 1백 13명과 67년의 여의도 철거민 2천 1백 59가구 1만 7백 95명등 모두 2천 6백 27가구 1만 2천 9백 8명이었다. 이해말의 인구는 모두 3만 1천 8백 4명이돼 당시보다 5배가 넘는 숫자가 됐지만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에 버려진 정착민들의 15%는 제몫의 땅을 남에게 팔고 딴곳으로 옮아갔다. 68년말에 6만 3천 5백 20명이돼 67년보다 3만 1천 7백 16명이 늘고 69년엔 8만 4백 75명이 돼 68년보다 1만 6천 9백 55명이, 70년엔 11만 4천 9백 95명으로 69년말보다 3만 4천 5백 20명이는 인구의 증가추세가 이를 입증하는 것. 결국 이처럼 66년 이후 급격히 팽창한 봉천동의 인구와 이곳의 발전추세는 난민정착지로 책정된 뒤 서울시의 각종 건설사업이 펼쳐져 논밭투성이였던 이곳에 길이 뚫리는 등 땅값을 올리는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71년 1월 21일자 매일경제, "봉천동 개발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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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YWCA봉천동 사업관(위원장 김천)에서는 21일 하오2시 [봉천동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세미나르]를 개최했다. 주제는 ‘여성의 능력을 사회정의 실현에’ 이고 제목은 ‘여성능력개발’,‘가족계획에 의한 이상적인 가정’
사진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3년 7월 28일자 조선일보
사진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3년 7월 28일자 조선일보
▶1973년 07월 28일자 조선일보, "관악의 청사진 어디까지, 서울대 교사신축 제1단계 점검, 공정 10만평 중 65%진척, 과학관등 내외벽 공사한창, 내년 신학기부터 문리대-법대 등 5개 대학 -6개 대학원 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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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서울대 문리대등의 현부지 4만 3천 5백 57평을 매각하기 위해 지가 감정에 들어감으로써 서울대 종합화 10개년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내년 3월 신학기부터 문리대 법대, 상대, 사대, 가정대및 대학원과 5개 특수대학원(경영,행정,신문,교육, 환경)이 1단계로 이전, 관악캠퍼스의 새생활이 시작된다. 연말로 끝날 1단계 사업의 공사가 얼마큼 진척됐는지 돌아 본다. 서울 영등포구 신림동에서 완만한 S자형 포장길을 돌아서면 관악산 허리에 총부지 6백 22만평의 동양제일의 광대한 오픈 캠퍼스가 나타난다. 이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며 현재 건설중인 지구과학관(2동)물리관(2동) 화학관(2동)건물이 왼편에서 부터 세모꼴로 놓여있다.
이 건물들은 지난 6월말까지 골조 공사가 끝나고 내벽 및 외벽공사에 들어갔다. 뒤에 있는 인문관(3동)사회관(3동) 교육관(2동)생물관(1동) 중앙도서관의 골조공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이 건물들이 총 건평 10만평의 1단계분이다. 70년 5월 5일 서울대학교 종합계획추진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발족, 현재까지 1단계 사업의 65%공정을 이루었으며 연인원 2백 40만명, 차량 3만대가 동원됐다.
사진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원출처: 1973년 06월 28일자 경향신문
▶1973년 06월 28일자 경향신문, "신설 관악구, 23동 60만 6천여명,고급주택가 난민촌균형발전이 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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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신설된 서울시 관악구는 53,845km2의 면적에 인구 60만 6천 1백 7명을 갖고 있다. 오는 7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하게 될 관악구청은 지금까지 영등포구에 속해 있던 본동 노량진 1,2동 상도 1동~3동 봉천1동 ~4동 흑석 1동~3동 동작동 사당1동~3동 대방1,2동 신대방동 신림1동~3동등 23개동을 관할하게 된다. 서울시가 행정구역 개편안을 발표한 이후 상도동 봉천동 신림동 사당동등의 유지급 주민들이 자기들 동네로 구청 유치작전을 치열하게 벌여왔으나 아직 부지가 확정안된채 봉천2동 7의 185 구봉천예식장의 5층 건물 중 3층까지를 임시청사로 사용하기로 하고 내부수리를 끝내가고 있다. 임시청사가 들어서는 봉천2동의 주민들은 이때까지 그들이 사는곳이 난민촌이란 좋지 않은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이름을 씻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으며 성급한 복덕방 주인들은 땅값이 뛸 기대에 부풀어 있다. 주민 이현의 씨는 호적등본민원서류를 떼려면 버스를 갈아타고 영등포구청까지 가야했는데 앞으로는 바로 집앞에 구청이 생겨 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방동 신대방동의 주민들은 구청과의 거리가 2km(km)나 더 멀어져 전보다는 불편하게 되었다는 것. 주민 이윤철씨는 당장 느껴지는 불편은 없으나 앞으로 행정구역개편에 따를 학구제개편등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고 말하고 있다. 신설된 관악구에는 신림동에 신축중인 서울대학교와 흑석동의 중앙대학교. 상도동의 숭전대학교등 3개의 종합대학과 동작동 국립묘지와 관악산 유원지가 있어 다른 구에 비해 넓은 임야와 녹지를 관장하게 된다. 이구에는 상도동 흑석동등의 고급주택가가 있는가하면 신림, 봉천, 사당동을 난민집단촌도 함께 있어 앞으로 이지역 발전을 위한 고른 행정적 배려가 요구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