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

신림과 설입사이: 봉천에 대한 감상

" 봉천동에서 나고 자라면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이후에야, 봉천동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봉천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뜸 봉천이 어디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봉천을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사는 곳이라고만 여겼던 동네는 남에게 소개할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봉천보다 유명한 지역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마침 신림과 서울대입구는 봉천의 양 옆에 위치하고 있었고, 봉천을 모르더라도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봉천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봉천을 설명해야 할 때면 언제나 ‘신림과 설입(서울대입구) 사이’로 봉천을 설명해왔다."

"문득 내가 봉천을 설명하는 방식이 봉천에서 태어나서 나고 자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봉천이 신림과 서울대입구 사이에 있다는 말은 소개라기보다 사실을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봉천을 가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봉천은 신림과 서울대입구 사이에 있는 동네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어디에 사는지 설명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내가 사는 곳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묘사였다. 그래서 신림과 설입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 일상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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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주성
글이 담긴 곳 
1) 브런치 : https://brunch.co.kr/@charlie885
2) ULC PLESS: https://ulcpress.com/forum/view/45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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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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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퍼온 글, '봉천'에 대하여

뉴서울 상회 간판이 있던 자리에는 ‘봉천슈퍼’간판이 걸려 있었다. 봉천상회 아줌마가 뉴서울상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우리 서울에서도 올림픽을 열었으니, 라며 너스레를 떨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서울-. 나는 그 말이 어찌나 우스웠는지. 이십 년이 지난 자리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봉천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와 있었다. ‘뉴’가 사라졌다. ‘봉천’을 지우겠다고 붙였던 ‘서울’도 사라졌다. 거지 동네 봉천은 결국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것이다. 2008년 에 봉천동은 법정동으로 전락했고 봉천동을 갈가리 찢어 낸 곳에 은천동, 성현동, 행운동, 중앙동 같은 이름이 붙었지만, ‘봉천’ 팻말은 그 모진 세월에도 좀처럼 떨어져 나갈 줄을 몰랐나 보다. 뉴-서울을 밀어내고 다시 자리를 차지한 봉천을 보면서 나는 웃었다. 성내역은 잠실나루역이 되고, 신천역은 잠실새내역이 되는 것을 보면 봉천의 운명도 별로 다르지는 않아 보이지만, 여하튼 봉천역은 아직도 봉천역이다. 봉천은 뉴 - 서울과 아무도 모르게 계속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로 듣는 '봉천동'의 어제와 오늘

" 우리나라가 지극히 어려웠고 국민소득이 동남아국가에도 못 미치던 60년대에는현재의 봉천본동으로부터 11동까지 12개동은 영등포구 관할이었으며 봉천동이라는 동명은 1개뿐이었다. 당시 초대 봉천동 동장은 장승백이에 살던 하재구씨였으며 을지지역 경찰서장을 지낸 사람이다.

2대 동장은 성상영씨였는데 영등포 갑지구당 보사분과위원장으로 있던 사람이고 3대동장은 중앙시장에서 고무신가게를 하면서 상가번영회장을 하던 신상운씨였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봉천동이 4개동으로 나눠지면서 제1동장은 전재봉씨가임명되고 봉천제2동장은 신상운씨, 3동장은 황병식씨, 4동장에는 김종열씨였다.

예비군 중대장은 봉천동 당시 문용석씨였으며 4개동으로 나눠진 다음 1중대장에문용석씨, 2중대장 이성노씨, 3중대장 김명섭씨, 4중대장은 파월장병 출신인 이병기씨였다.

예비군 편제가 바뀌고 다시 9개 중대로 나눠지면서 5중대장에 김두영씨, 6중대장은 이영춘씨였고 지역일을 하면서 방위협의회 의원을지낸 고달모씨가 당시 9중대장이었다.이 무렵까지 원주민들은 순박하고 인정 넘치는 전형적인 토박이 한국인들이었는데 구대인들의 가문을 보면 김씨집안의 대부는 봉천지역에 땅도 많고유지였던 김봉학씨였으며 현재 84세의 백발노인이다.

이 집안은 현 김효겸 관악구의회 의장의 선친인 김종수씨가 1973년 관악구청 청사를 건축할 때 부지 1,500평을 기증했었다. 현 낙성대새마을금고의 전신인 봉천7동새마을금고 이사장과 봉천7동장을 역임했던 김종열씨와 김종윤씨의 가문이기도 하다. 또한 관악구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현재 봉천5동새마을금고 이사장인김기선씨의 선친인  김장근씨도 현 봉천5동 일대에 많은 땅을 갖고 있는 지역의 유지였다.

관악구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현재 은천새마을금고 이사장인 이정천씨의 부친되는 전주이씨 이공원씨도 은천로변에 많은 땅을 소유한 지역유지였으며 무엇보다은천로 개설과 은천초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최씨집안은 현재 작고한 최재안씨가 대부였으며 현 은천로변의 국민은행관악지점 뒤쪽에 작은 주택들을 즐비하게 지어 분양하기도 했다. 당시 최남진씨를 최씨가문의 대표로 키우려 애썼으나 여러가지 감언으로 접촉하던 사기꾼에 돈만 뜯겼고 나중에 봉천파출소 방범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나 워낙 방랑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후 동생인 최윤진씨는 공화당관리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종열씨가 동장으로 임명되자 후임으로 마을금고 이사장을 역임했는데 김종열씨가 동장에서 퇴임하면서 다시 마을금고 이사장 자리를 넘겨주기도 했다. 최윤진씨의 장조카 최용권씨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 되기도 했고 봉천1동에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하기도 했다.
 
이씨집안에서는 동장을 역임하고 당곡새마을금고 이사장을 지내다 작고한 이한규씨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1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이정환씨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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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출처: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joinuswoori/HZ98/54
2) 글쓴이: 왕정순
3) 작성일자: 2006년 12월 27일
4) 현재 관악구가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시작에는 지역유지들의 영향이 컸으며, 그 역할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천로 개설, 은천 초등학교 설립, 은천로변 국민은행 관악지점 뒤쪽 작은 주택, 봉천1동 연립주택, 관악구청 청사 신축 당시 부지 1,500평 기증 등 논과 밭이 대부분을 차지 하던 봉천동에 도시기반시설이 만들어지는 것에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5) 키워드 : 은천로, 은천초등학교, 연립주택, 관악구청 청사